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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보아요.

가야와 고구려: 철기 무역과 외교로 이어진 역사

by heimish_ddd 2022. 10. 25.

1.가야의 성장과 멸망: 철기와 무역의 중심지

가야는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삼한 중 하나인 변한에서 성장한 세력이었습니다. 6세기 중반까지 여러 소국이 존재했으나, 소국끼리 여러 형태로 변화했습니다. 가야 건국 설화에 따르면, 구지봉에서 하늘의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 거북이 머리를 내라고 부르며 노래하고 춤을 추는 동안 금빛 상자에서 여섯 명의 아이가 태어났다고 전해집니다. 이 아이들 중 가장 먼저 태어난 김수로가 금관가야의 왕이 되었으며, 이는 가야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가야는 2세기 무렵 낙동강과 경상남도 해안 지대에서 빠르게 발전하였으며, 이를 금관가야라 불렀습니다. 김수로왕의 지도 아래, 철기 생산과 바다를 끼고 있던 지리적 특성을 활용하여 철기 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이 시기 가야는 낙랑 세력과 일본(왜) 사이의 중개 무역을 통해 큰 이익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철제 무기로 무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백제와 일부 왜군과 함께 신라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2.가야의 전성기와 쇠퇴

가야는 초기에는 백제와 왜 사이의 중개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무역을 통해 크게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4세기 말, 고구려와 신라의 밀약으로 백제와의 외교가 끊어지며 김해를 중심으로 한 가야의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습니다. 이후 가야의 소국들은 신라 세력에 흡수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가야는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5세기 후반, 고령, 합천, 산청 등 낙동강 서쪽 지역에서 재기를 노린 가야는 농업 생산력의 안정과 무역을 통해 다시 발전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이후 반파국이 중심이 되어 대가야국으로 발전하였으며, 고대 한국에서 중요한 상업적 중심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6세기 중반, 가야 세력은 고령의 대가야와 함안의 안라국으로 분열되었고, 무역의 활로가 차단되면서 세력의 쇠퇴가 가속화되었습니다.

3.가야의 멸망과 신라와의 통합

554년 관산성에서 백제와 신라의 전투가 벌어졌을 때, 가야는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에 맞섰습니다. 그러나 신라가 승리하면서 가야는 신라에 복속되었고, 금관가야를 비롯한 여러 소국들은 신라에 통합되었습니다. 가야는 사라졌다기보다는 '스며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야의 지배 세력은 신라의 귀족으로 편입되었으며, 가야인의 문화와 전통은 신라에서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였습니다. 하지만 가야인들은 초기에는 '가야계'라는 이유로 차별과 멸시를 받기도 했습니다.

4.고구려와 수나라, 당나라와의 전쟁

6세기 말부터 7세기 초, 고구려와 중국의 통일 왕조 간의 전쟁은 거대한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중국은 한나라가 멸망하고, 220년 이후 양쯔강을 기준으로 북조와 남조로 나뉘었으며, 북조의 우문씨 세력은 '수나라'를 세워 국가를 통일하려 했습니다. 수문제는 내부 개혁을 단행하고, 토지 제도를 개혁하며 중앙집권적인 통치를 강화했습니다. 고구려는 이에 대응하여 수나라와의 교류를 끊고 국경을 막았으며, 수나라의 공격을 물리친 후 고구려는 독립적인 외교 노선을 유지했습니다.

수나라는 고구려를 복속시키려 했으나, 고구려의 영양왕은 이를 거부하고 국경을 막았습니다. 612년, 수나라의 군대는 을지문덕의 지휘 아래 고구려의 유인작전에 말려 살수에서 전멸했으며, 이후 수나라는 고구려를 침공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수양제는 실패한 원정과 대규모 토목 공사로 인해 민심을 잃고 결국 반란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수나라가 멸망한 후, 이연은 당나라를 세워 중국을 재통일하였고,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새로운 외교 노선을 수립하려 했습니다.

결론: 가야의 유산과 고구려의 승리

가야는 철기 생산과 무역을 통해 큰 경제적 성장을 이룬 국가였으나, 점차 신라에 흡수되면서 그 존재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야인의 문화와 전통은 신라 사회에 스며들어 여전히 남아있었고, 이들은 신라 사회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한편, 고구려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독립을 지켰고, 이후 당나라와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외교적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고구려의 영양왕은 수나라의 침공을 물리친 후, 당나라와의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며 한반도에서의 지배력을 이어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