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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보아요.

삼한과 동예, 옥저를 통합한 고구려의 성장사

by heimish_ddd 2022. 10. 24.

1.광개토대왕의 등장과 고구려의 부흥

광개토대왕의 본명은 담덕으로,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다. ‘광개토’는 “땅을 넓힌 왕”이라는 의미로, 그의 정복 활동과 영토 확장의 업적을 상징한다.
고구려는 부여계 유이민압록강 유역의 토착민이 결합해 세운 나라로, 산악 지대가 많아 농사보다는 정복 활동에 초점을 두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건국 초기부터 끊임없는 영토 확장이 이어졌다.

초기에는 한나라의 한사군 세력과 충돌했고, 이에 대응해 고구려는 태조왕 시기 계루부 중심의 5부 체제를 갖추고 왕권을 강화했다. 이후 옥저와 동예를 제압하며 낙랑군과의 충돌로 서서히 세력을 넓혀갔다.

2.위나라의 침공과 고국원왕의 위기

3세기 초, 삼국지 위서의 기록에 따르면 오나라가 위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와 외교 접촉을 시도하면서 고구려는 위나라의 침공 대상이 된다.
관구검이 이끄는 위나라군에 밀려 고구려의 동천왕은 수도를 버리고 피신했고, 두만강 유역과 만주 일대가 폐허가 됐다. 고구려는 전란을 수습하는 동안 국가 체제를 정비했으며, 위나라와 진나라가 차례로 멸망하면서 새로운 기회를 맞았다.

그러나 이후 등장한 전연과의 충돌에서 고국원왕은 환도성을 빼앗기고,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과 어머니까지 볼모로 끌려갔다. 이로 인해 고구려는 서북 방면 진출을 포기하고, 대신 남쪽 백제와의 충돌에 집중하게 된다.

371년, 백제 근초고왕과의 전투에서 고국원왕은 전사하며 고구려는 또 한 번 위기를 맞는다.

3.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과 영토 확장

고국원왕의 뒤를 이은 소수림왕은 태학 설립율령 반포를 통해 왕권 중심의 통치 체제를 확립했다. 이를 기반으로 고국양왕을 거쳐 즉위한 광개토대왕은 17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쳤다.

그는 392년과 396년 백제와의 전쟁에서 북부 영토와 한강 유역까지 확보하였고, 백제로부터 58성 700촌을 획득했다. 이후에는 후연과의 전쟁을 통해 숙군성, 요동성, 수도 용성을 점령하며 후연을 압도했다.

410년 동부여 정복을 마지막으로 동서남북으로 영토를 확장한 그는 413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정복 활동은 고구려의 전성기를 연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그의 아들 장수왕은 427년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켜 한강 유역까지 완전히 장악했다.

4.고구려 주변국: 옥저, 동예, 삼한의 역사와 흡수

고구려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소국들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옥저는 기원전 2세기경부터 존재했던 예족 계열 부족으로, 독자적인 왕권은 없었으며 민며느리제라는 특이한 혼인 제도를 운영했다. 한사군 쇠퇴 이후 고구려에 복속되어 자원과 인력을 제공했다.

동예는 동해안을 따라 옥저의 남쪽에 있었고, 해산물과 오곡이 풍부했다.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통해 집단 간 결속을 다졌고, 피지배 계층으로 하호, 생구 같은 계층이 존재했다. 동예도 4세기 말 고구려의 영역으로 편입된다.

삼한은 마한, 진한, 변한으로 구성된 소국 연합체였다. 기원전 2세기경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 자리 잡았으며, 제사장인 천군이 소도를 다스렸다. 소도는 정치 지배자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신성한 구역이었다.

삼한은 벼농사와 철 생산이 활발했으며, 낙동강 유역에서는 가야, 진한 지역에서는 신라로 발전하는 국가들이 등장했다. 이는 삼한이 점차 해체되고 고대 국가 체제로 전환되는 과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