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고조선의 건국 신화와 청동기 문화
고조선의 시작은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옛날에 환인의 서자 환웅이 천하에 자주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부러워하였다”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 환웅은 하늘에서 내려와 인간 세계를 다스릴 뜻을 품고 있었다. 이에 환인은 환웅에게 천부인 세 개를 주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보내 신시를 세우게 했다.
이 신화는 고조선이 단순한 부족 사회가 아니라 천손 사상을 바탕으로 한 제정일치적 사회였음을 시사한다. 곡식과 생명, 형벌, 선악 등을 관장한 환웅은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려 백성을 교화하고 다스렸으며, 이는 체계적 지배구조의 존재를 의미한다.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기를 빌며 쑥과 마늘을 받아 동굴에서 수련한 이야기는 토테미즘의 흔적을 보여주며, 결과적으로 곰은 여자가 되고 환웅과 결혼해 단군왕검을 낳는다. 단군은 고조선을 세웠고, 이는 한반도 역사에서 국가의 형성이 시작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고조선은 청동기 문화를 기반으로 성장한 국가로 보인다. 고인돌 등 거대한 무덤 유적은 지배층의 권력을 상징하며, 청동기 기술을 보유한 이들이 통치자로 군림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처럼 청동기 시대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분, 그리고 잉여 생산물의 발생을 통해 사회가 점차 계층화되던 시기였다.
2. 철기 문화의 도입과 위만 조선의 등장
청동기 문명을 기반으로 성장한 고조선은 곧 철기 시대로 접어들며 새로운 변화를 맞이했다. 중국 연나라 출신인 위만이 조선에 들어와 준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면서 위만 조선이 시작된다. 그는 조선이라는 국호를 유지하고, 현지인을 등용하여 기존 체제를 계승하면서도 중국의 선진 철기 문물을 도입했다.
철제 무기와 농기구는 농업 생산성을 증가시키고 군사력을 강화해 위만 조선은 주변 세력을 복속시키며 세력을 확장했다. 중계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던 위만 조선은 결국 중국 한나라와 충돌하게 된다. 한나라의 무제는 고조선을 침공했고, 약 1년간의 항전 끝에 기원전 108년 왕검성이 함락되며 고조선은 멸망하게 된다.
고조선 사회는 팔조법으로 법과 질서를 유지했으며,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재산권도 인정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조항을 비롯해 피해 보상 및 형벌 규정이 정비된 사회였다. 이로 보아 고조선은 단순한 부족 연합체가 아닌, 법과 제도가 정비된 초기 국가 체계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고조선 이후의 변화와 부여의 발전
고조선이 멸망한 후, 한나라는 낙랑군, 임둔군, 진번군, 현도군의 한사군을 설치해 이 지역을 통치하려 했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멀고 통제가 어려워 몇 세대가 지나자 독립 세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한반도에 새로운 역사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 시기에 성장한 대표적인 나라 중 하나가 부여이다. 부여는 고조선과 거의 같은 시기에 건국되어 삼국 시대 전까지 존속했으며, 약 7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부여의 시조는 ‘동명’으로, 북쪽의 탁리국에서 이주해 나라를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왕 아래에는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의 대가가 사출도를 나누어 다스리는 구조였으며, 이는 중앙과 지방이 나뉜 귀족 중심의 분권 체제임을 의미한다.
부여 사회는 목축 중심의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는 형사취수제 같은 가족 보호 풍습이 있었다. 매년 12월에는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통해 하늘에 제사를 지냈고, 이는 곧 사냥철의 시작을 알리는 공동체 행사였다. 유목적 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귀족들은 금은으로 장식하고 수많은 노예를 거느렸으며 심지어 순장까지 있었다. 이는 강력한 지배층의 존재를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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