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거란과 고려의 초기 관계
고려는 한반도에서 중요한 정치적, 군사적 역할을 했지만, 그 외교적 교류는 중국과 북방의 여러 왕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특히 고려와 거란은 중요한 관계를 맺었다. 거란은 만주 지역의 유목 민족으로, 여러 부족들이 중국의 통일 왕조와 고구려의 영향을 받으며 발전했다. 당나라가 멸망하고 거란의 영웅 야율아보기가 등장하면서 거란은 916년에 자리를 잡고 국호를 ‘거란’으로 정했다. 925년 거란은 발해를 침공하고,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며 그 유민들은 송나라와 고려로 흩어졌다.
고려와 거란의 관계는 942년 요나라 태종이 고려에 낙타 50 필을 보내며 친교를 시도했지만, 고려 태조 왕건은 이를 거절하고 낙타를 죽이며 거란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이 사건을 '만부교 사건'이라 부른다. 이후 고려는 거란과의 관계에서 방어적 태도를 취하며, 정종 때 광군 30만 명을 양성하고 군사력을 강화했다. 이 시기에 고려는 서북쪽과 동북 방면에 성을 쌓고 군사 시설을 구축했다. 성종이 즉위한 후, 송나라가 중원을 통일하면서 고려와 송은 거란에 대해 공동의 관심을 가지고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2. 고려와 금나라의 관계
고려는 거란과의 갈등을 지나, 여진족의 금나라와도 중요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 여진은 처음에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부르며 조공을 하였으나, 금나라의 성장과 함께 그 관계는 변했다. 1121년 송나라와 금나라가 협력하여 요나라를 멸망시키자, 금나라는 고려에게 사대의 예를 요구했다. 처음에는 이를 거부했으나, 1126년 고려는 금나라에 사대의 예를 갖추고 책봉을 받기로 결정했다. 요나라의 멸망 이후 금나라는 송나라의 수도를 점령하고 송나라를 남송으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금나라의 압박은 계속되었고, 고려는 송나라와 협력하여 금나라와의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금나라의 군사력은 점차 강해졌고, 1130년대에는 몽골의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금나라와 송나라 간의 전쟁이 지속되었고, 금나라는 송나라와의 전쟁을 마무리 짓기 위해 송나라와 협정 체결을 시도했다. 금나라 태종은 송나라를 공격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금나라의 군사력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3. 몽골의 침략과 금나라의 멸망
몽골의 칭기즈 칸은 13세기 초 금나라를 위협하며, 금나라의 국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칭기즈 칸은 1211년부터 금나라에 대한 대규모 침략을 시작했고, 금나라는 15만 명의 군사로 맞섰지만, 몽골군에게 대패하였다. 이후 금나라의 수도 중도대흥부가 몽골군의 공격을 받으면서 금나라의 국력은 심각하게 약화되었고, 1213년에는 몽골과의 평화 협정을 맺으며 전쟁을 종료시키려 했으나, 그 후에도 몽골의 위협은 지속되었다.
금나라 선종은 몽골의 침략을 막기 위해 송나라를 정벌하려 했지만, 송나라 군에 패배하면서 금나라의 위상은 크게 떨어졌다. 금나라의 내부는 혼란스러워졌고, 1227년 칭기즈 칸의 사망 후, 몽골은 더욱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금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다시 침략을 시작했다. 1234년, 금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애종은 몽골군에 의해 포위당하고 자살하면서 금나라는 멸망했다.
결론
고려와 북방의 왕조들은 상호 간의 군사적, 외교적 관계를 통해 한반도의 정치 지형을 형성했다. 거란, 금나라, 몽골과의 교류는 고려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의미하며, 고려의 외교 전략은 국가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였다. 고려는 북방의 강대국들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맞추며, 민족의 독립성과 국가의 안정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지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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