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알아보아요.

조선 말기 동학농민운동에서 대한제국 몰락까지

by heimish_ddd 2022. 11. 9.

1.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의 발발

1894년, 조선 사회는 극심한 혼란 속에 빠져 있었다. 지방에서는 탐관오리의 부정부패가 심화되었고, 백성들은 과도한 세금과 수탈에 시달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들은 억압과 고통에 저항하며 봉기했다. 이것이 바로 동학농민운동, 또는 갑오농민전쟁이다. 동학은 하늘과 인간이 하나라는 평등사상을 바탕으로 한 종교였으며, 민중 사이에서 급속히 퍼져나갔다. 농민군은 부패한 관리의 축출과 사회 개혁을 요구하며 전국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켰고, 그 기세는 관군을 위협할 정도였다.

조선 정부는 이 상황을 통제할 수 없어 청나라에 군사적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를 구실 삼아 일본도 군대를 파병하며 조선에 개입했고, 결국 조선 땅에서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충돌하는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은 일본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고, 일본은 청나라와 1895년 4월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을 통해 요동반도, 대만, 팽호열도 등을 할양받고 청나라로부터 배상금도 받아냈다. 그러나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이를 견제하며 일본의 요동반도 점유에 반대했고, 결국 일본은 요동반도를 다시 청나라에 반환해야 했다.

2. 갑오개혁과 명성황후의 죽음

청일전쟁 이후 조선 내 정치적 상황도 요동쳤다. 외세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조선은 국제정치의 격전장이 되었다. 고종은 이러한 위기 속에서 조선의 자주성과 근대화를 도모하고자 갑오개혁을 단행했다. 갑오개혁은 신분제를 폐지하고 과거제를 철폐하며, 근대적 행정 제도와 법률 체계를 도입하려는 시도였다. 이는 조선 역사상 전례 없는 대대적인 개혁이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고종과 명성황후는 이를 견제할 외세로 러시아를 선택했다. 명성황후는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긴밀히 협력하며 친러 외교를 강화했고, 이는 일본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은 조선에서의 정치적 주도권을 잃을 것을 우려하여 강경 대응에 나섰고, 결국 1895년 10월, 일본군과 조선군 일부, 일본 낭인들이 궁궐에 침입해 명성황후를 잔혹하게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조선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도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고종은 일본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고, 이를 아관파천이라 부른다. 이로 인해 조선 정계는 다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3. 대한제국의 성립과 개혁의 한계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정국을 주도하려 했고, 정동구락부를 중심으로 한 관료들이 권력을 잡는다. 이들은 외국과의 협력을 통해 조선을 근대 국가로 탈바꿈시키려 했으며, 그 중심에는 독립협회가 있었다. 독립협회는 고종과 함께 개혁 정치를 추진했으며, 의회 설립, 언론 자유, 민권 신장 등을 주장하였다.

1897년, 고종은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으로 환궁하며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이는 조선 왕조에서 벗어나 황제 중심의 자주 국가를 표방한 것이었다. 고종은 근대적 군제 개편, 해군 창설, 무관학교 설립, 광무개혁 등 여러 정책을 통해 국가의 자립을 시도했다. 궁내부를 중심으로 황실 직속 기관들을 정비하며, 황제 중심의 통치 체제를 확립하고자 했다.

하지만 개혁은 제도적 한계와 재정 부족, 외교적 고립 등의 문제에 부딪혔다. 내부적으로는 독립협회 내 갈등이 커졌고, 일부 인사들이 공화제를 주장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고종과 협회 간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결국 독립협회는 해산되었고, 고종은 전제군주 체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된다.

또한 고종은 외국 제품 소비에 과도하게 집착하며 덕수궁에 서양식 건축물을 짓는 등 외형적 근대화에 치중했으나, 실질적인 국가 경쟁력은 크게 개선되지 못했다. 외교적으로도 대한제국은 열강 사이에서 고립되었고, 일본의 조선 침탈 야욕을 막지 못한 채 점점 힘을 잃어갔다. 결국 대한제국은 광무개혁의 실패와 국제 정세 속에서 무너지며, 한일 병합으로 식민지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결론

조선 말기부터 대한제국 시기까지, 조선은 내부 개혁과 외세의 압력 사이에서 고군분투했다. 갑오개혁과 광무개혁은 조선을 근대 국가로 전환하려는 의지가 담긴 시도였지만, 국제 정세에 대한 대응 부족, 재정과 행정의 한계, 내부 정치 혼란으로 인해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특히, 명성황후 시해, 아관파천, 독립협회 해산, 고종의 전제 강화 등의 사건은 조선이 스스로 자주성을 확보하기엔 역부족이었음을 보여준다. 외교적으로도 러시아, 일본 등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주체적인 외교 전략을 세우지 못한 채 점점 주권을 잃어갔고, 결국 대한제국은 일제의 침략 앞에 무너지며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