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혼란한 조선, 세도정치와 민란의 시대
정조가 죽은 뒤 조선은 중심을 잃었다. 왕권은 약화되었고, 정치는 안동 김 씨와 같은 몇몇 유력 가문이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이들은 권력을 이용해 관직을 돈으로 사고팔았으며, 지방관들은 자신이 산 관직 값을 농민들에게서 거두어들였다. 수탈은 심해졌고 백성들은 삶을 이어가기 어려웠다. 백성의 원성은 쌓였고,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삼정의 문란(전정·군정·환곡)은 조선 사회 전반을 마비시켰고, 나라 전체가 위태로운 상황에 빠졌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한 인물이 조선을 구하고자 등장한다. 그는 바로 흥선대원군 이하응이다. 이하응은 왕족이었지만, 인조의 넷째 아들 인평대군의 후손으로 왕위 계승권에서는 한참 밀려 있었다. 하지만 조선에는 아들을 입양해 가계를 잇는 양자 제도가 있었고, 이를 통해 왕실로 접근할 수 있었다.
마침 철종 역시 후사가 없었고, 이하응은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을 왕위에 올리기 위한 정치적 움직임을 시작했다. 그는 대왕대비 조 씨(신정왕후 조 씨)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아들을 익종의 양자로 들여 왕실 혈통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그 결과, 철종이 사망한 후 명복은 12세의 나이에 제26대 왕 고종으로 즉위했다.
2. 흥선대원군의 통치 개혁과 쇄국 정책
고종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조대비가 섭정을 맡았고, 실질적인 권력은 흥선대원군에게 있었다. 그는 조선을 다시 세우기 위해 과감한 개혁에 나섰다. 우선 권력을 독점하던 세도가문과의 관계를 단절했고, 조선을 지탱하던 사회 구조 자체를 개혁하고자 했다. 붕당 정치를 억제하고, 전국의 수많은 서원을 정리했다. 당시 서원은 지방 유생들의 정치적 기반이자 면세 혜택의 중심이었다. 흥선대원군은 47개의 서원을 제외하고 전국의 모든 서원을 철폐함으로써, 학문과 명분을 앞세운 기득권층의 저항을 꺾고자 했다.
또한 조선 후기 사실상 최고 통치기구였던 비변사를 폐지하고, 본래의 체제인 의정부와 삼군부를 복원하여 《경국대전》에 따라 통치하려 했다. 이는 조선을 건국 당시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되돌리려는 시도였다. 더 나아가 왕권의 상징인 경복궁을 중건하며, 무너진 왕조의 위엄을 회복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개혁은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서원 철폐로 인한 지배층의 불만은 물론, 경복궁 중건에 따른 과도한 백성 동원과 조세 부담은 민심을 흔들었다. 더욱이 외세의 위협이 조선의 안위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프랑스, 미국, 독일 등 서구 열강은 통상을 요구하며 무력시위를 감행했고, 조선은 점점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흥선대원군은 이에 쇄국 정책으로 대응했다. 그는 외세와의 어떤 협상도 거부했으며, 척화비를 전국 주요 거점 200여 곳에 세워 ‘서양 오랑캐와 화친하는 자는 이적’이라는 강경한 메시지를 남겼다.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등 서구의 침입에도 물러서지 않았고, 조선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다.
3. 민비의 등장과 권력 재편, 흥선대원군의 실각
고종이 성장하며 조선의 권력 구도는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고종의 왕비로 간택된 민비는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으로 알려졌지만,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녀는 외척 세력과 개화파 일부를 규합해 흥선대원군의 강경 노선을 비판했고, 개화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서구와의 외교를 주장했다.
흥선대원군의 정책에 비판적이었던 유학자 최익현은 다시 등용되었고, 그는 상소를 통해 흥선대원군의 퇴진을 주장했다. 그 결과, 흥선대원군은 정계에서 밀려나고, 고종과 민비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그들은 결국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며 조선의 문을 열었다. 이는 조선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지만,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를 계기로 서구 열강과 일본이 조선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4. 외세 개입과 개화 갈등, 조선의 내부 분열
개항 이후 조선은 근대화의 길을 모색하며 일본에 수신사를 보내 문물을 조사했고, 청나라에는 영선사를 파견해 군사 기술을 배우기도 했다. 김홍집은 일본에서 <<조선책략>>을 입수해 미국·청국·일본과 손잡아 러시아를 견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하지만 급변하는 현실은 오히려 백성들의 불안을 키웠고, 군사제도의 변화에 따른 불만이 임오군란(1882)으로 터졌다.
이 반란은 구식 군인들의 생계 위협에서 비롯되었고, 민비의 민 씨 척족과 개화 세력의 부패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다. 반란이 확산되자 흥선대원군이 다시 정계로 돌아오지만,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긴 민비와 개화파는 청나라에 군사 개입을 요청했다. 흥선대원군은 청에 의해 납치되어 다시 정치에서 배제된다.
이후 조선 정계는 급진 개화파(김옥균)와 온건 개화파(민비 중심)로 나뉘었고, 1884년 김옥균이 일본의 도움을 받아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정권을 장악하고 근대화를 추진하려 했지만, 3일 만에 청군의 개입으로 진압되며 실패로 끝난다.
결론
이처럼 조선 말기는 쇄국과 개항, 전통과 개화, 내부 개혁과 외세 침략이 얽히며 극심한 혼란기를 겪었다.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왕권과 자주성을 바탕으로 조선을 지키려 했지만,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이후 조선은 본격적인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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