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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보아요.

숙종과 영조의 정치적 갈등과 탕평책

by heimish_ddd 2022. 11. 2.

1. 숙종의 환국과 정치적 갈등

숙종은 끊임없는 정치적 갈등과 권력 투쟁 속에서 나라를 다스렸고, 그로 인해 조선 후기 정치의 주요 특징인 붕당 정치가 더욱 복잡해졌다. 숙종은 여러 차례의 환국을 통해 각 붕당 간의 경쟁을 부추기며,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특히 장희빈의 아들인 윤은 소론의 지지를 받아 세자 자리에 오르며, 숙빈 최 씨의 아들 연잉군은 노론의 지지를 얻어 두 세력이 정치적으로 맞붙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현왕후가 사망하고 세 번째 왕비인 인원왕후에게서도 왕자가 태어나지 않으면서 정치적 긴장감은 더욱 고조되었다.

숙종 사후,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은 건강이 악화된 숙종을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맡았다. 그러나 경종의 즉위는 그리 순탄치 않았다. 경종은 소론과 협력하여 국정을 운영했지만, 수적으로 우세한 노론과의 갈등은 계속되었고, 노론은 연잉군이 차기 왕이 되도록 지지하려 했다. 그러나 소론은 이를 강력히 반대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신축옥사'라는 사건을 일으켜 노론을 제거하고자 했다. 이 사건은 소론의 반역을 조작해 노론을 제거하려는 시도였다.

2. 영조의 즉위와 정치적 변동

경종이 사망하고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며 영조가 되었다.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을 왕위에 앉힌 노론의 지지를 받으며, 신축옥사와 임인옥사 사건에서 피해를 입은 노론을 복권시켰다. 영조는 이러한 사건들의 주동자들을 처형하며 자신의 왕권을 확립해 나갔다. 경종은 만성 질환으로 사망했으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었고, 일부에서는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영조는 즉위 후, 1728년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며 정권을 더욱 안정시켰다. 이인좌의 난은 소론 세력과 남인들이 공모해 밀풍군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그러나 영조는 이를 진압하고 이인좌를 비롯한 반란 세력에 대한 처벌을 단행했다. 이 사건을 통해 영조는 왕권을 더욱 강화하고,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영조는 탕평책을 구상하며, 이를 통해 노론과 소론의 영수들뿐만 아니라 남인까지 고르게 등용하며, 정치적 균형을 이루고자 했다.

3. 사도세자와 영조의 갈등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는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사도세자는 10세 때 결혼을 했고, 이후 첫 아들인 세손 정의 출생으로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이 잠시 완화되었다. 그러나 세손이 병을 앓고, 영조는 세자가 세손을 제대로 보양하지 못했다고 비난하며 갈등이 다시 심화되었다. 결국, 세손은 3년 만에 요절하게 되고, 사도세자는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사도세자는 군사에 관심이 많았고, <무기신식>이라는 병서를 집필하는 등, 무예와 군사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영조는 이를 학문을 통해 신하들 위에 군림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사도세자와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영조는 아들에게 질책과 호통을 계속하면서, 사도세자는 점점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불안정함을 느끼게 되었다.

사도세자는 9세 무렵부터 아버지와의 만남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이후 대리청정을 하게 되면서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영조는 여러 차례 왕위를 내려놓겠다고 주장하며 양위 파동을 일으켰고, 이에 사도세자는 아버지에게 애원하면서 양위를 철회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은 계속 이어졌고, 영조는 후계 구도를 변화시키기 위해 정순왕후 김 씨를 새 왕비로 맞이하게 되었다.

사도세자의 비행은 결국 영조에게 고발되었고, 사도세자는 폐위되고 뒤주에 갇히게 된다. 뒤주에 갇힌 지 9일 만에 사도세자는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곧바로 세손을 동궁으로 책봉하며,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11세의 나이에 정조가 왕위에 올라가게 된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며, 정국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결론

숙종과 영조는 각각의 시대에서 강력한 왕권을 통해 정치적 안정과 갈등을 해결하려 했다. 숙종은 여러 차례의 환국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고, 영조는 탕평책을 통해 정치적 균형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사도세자와의 갈등은 영조에게 큰 고민을 안겼고, 결국 왕권 강화의 과정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은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