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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보아요.

조선의 내외 정치 변화와 병자호란

by heimish_ddd 2022. 11. 1.

1. 일본과 여진족, 명나라의 쇠퇴와 조선의 외교 변화

16세기 후반, 일본은 에도막부 시대를 맞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정치적 안정 속에서 재통일을 이루었다. 여진족은 이 시기에도 꾸준히 성장을 계속하며, 명나라의 쇠퇴와 더불어 점차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명나라의 정세는 불안정했고, 특히 여진족의 성장과 함께 내부적으로 분열이 심화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은 새로운 국제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외교 관계를 재정비해야 했다.

조선은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여진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이성계 휘하에 여진족이 속할 정도로 두 나라는 강한 교린 관계를 맺었다. 교린 관계란, 조선이 국왕의 이름으로 여진족의 추장에게 관직을 주며 일정한 종속 관계를 맺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여진족의 금나라 멸망 이후, 부족들이 분열하며 조선의 국경을 넘어 약탈을 일삼았다. 이에 조선은 군을 이끌고 여진족을 정복하기도 했다. 명나라는 여진족의 통합을 경계하며 분열 정책을 추진했으나, 이 정책은 누르하치의 등장으로 크게 흔들리게 된다.

2. 누르하치와 후금의 성장

누르하치는 여진족의 작은 부족 추장이었지만, 명나라의 군대 실수로 가족이 죽임을 당한 뒤 복수를 다짐하며 여진족을 통합하기 시작했다. 명나라는 여진족의 분열을 꾀했으나, 만력제 시대의 방치로 그 정책은 실패했다. 누르하치는 1583년에 건주여진을 공격하며 부족들을 통합하기 시작했고, 1592년 임진왜란 중 명나라가 어려움을 겪는 틈을 타, 1605년 건주국을 세운 후 1616년에는 금나라를 재건했다. 금나라를 재건한 그는 명나라에 독립을 선언하고, 전쟁을 선포했다.

후금은 명나라의 요동 지역을 공격하며 군사적 팽창을 이어갔다. 이 시점에서 조선의 왕은 광해군이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중에 선조와 함께 국정을 운영하며 여러 어려움을 겪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국가 재건을 위한 여러 노력과 함께 내부 정치적 갈등에 직면했다. 1618년, 광해군은 명나라의 파병 요청을 거부하며 후금과의 관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명나라가 요동 지역을 수복하려는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지만, 광해군은 전쟁의 후유증과 조선 내부의 재정적 어려움을 이유로 거부했다.

3. 병자호란과 조선의 위기

광해군의 명나라 파병 거부는 결국 조선의 지배층과의 갈등을 초래했다. 조선의 지배층은 명나라와의 관계 유지와 재조지은을 주장하며 광해군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이에 1623년, 광해군의 폐위와 인조의 즉위를 목표로 한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반정 세력은 광해군의 외교 정책, 궁궐 중축, 그리고 후금과의 화친 등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다. 반정을 통해 인조는 왕위에 오르게 되며, 인조는 명나라에 이 사실을 알리고 책봉을 요청했다.

명나라와의 관계 유지를 원했던 인조는 명나라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으나, 후금의 성장과 그들과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1627년, 후금은 3만 명의 군대로 조선을 침략했다. 후금은 황해도 평산까지 진격하고, 조선과의 화의를 통해 철병을 결정했다. 이 화의는 후금의 군주인 홍타이지와 인조가 형제 맹약을 맺는 등의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조선은 여전히 명나라와의 군신 관계를 주장하며 후금과의 갈등은 지속되었다.

1636년, 홍타이지는 만주족과 몽골, 한인들의 추대로 황제로 즉위하며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명나라를 정벌할 준비를 했다. 조선은 이때 청의 압박을 받게 되었고, 청의 요구대로 조선 사신단이 홍타이지에게 삼궤구고두례를 거부하자, 청은 침공을 예고했다. 결국 1636년 12월, 청군은 12만 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된다. 인조는 강화도를 거쳐 숭례문을 통해 빠져나와 항전하지만, 청군은 그의 진로를 차단했다.

이후, 인조는 8도의 근왕병을 이끌고 전투를 벌였지만, 결국 강화 협정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인조는 청나라 앞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며 강화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로써 조선은 청나라의 신하국으로서의 지위를 인정하고, 명나라와의 국교를 단절하게 된다.

결론

병자호란은 조선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맞은 사건이었다.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조선은 심각한 외교적 위기를 맞이했고, 내적으로는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었다. 광해군의 외교적 선택과 인조반정, 그리고 청나라의 침공은 조선의 정치와 외교에 큰 변화를 초래했다. 이 사건은 조선이 명나라의 종속적 관계에서 청나라의 영향권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전환점을 의미하며, 이후 조선의 외교 정책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