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효종의 대의명분과 왕권 강화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봉림대군은 효종으로 즉위했다. 효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정치적 접근 방식을 취했다. 그는 자신의 통치 아래 산림(사대부 계층)들을 중용하며 정치를 이끌었다. 이 시기에 송시열, 윤휴 등 조선 후기 붕당의 중심인 관료 집단이 점차 조선 정계의 주요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그 당시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했으나,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북인은 사실상 소멸되었다. 서인과 남인의 정치적 경쟁은 인조, 효종, 현종 시기를 거쳐 본격화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관료들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한편으로는 급변하는 국제 질서에 적응해야 했다. 당시 명나라의 국력이 약화되고 청나라가 대세로 자리잡으면서 조선은 새로운 외교적 방향을 모색해야 했다. 이 시기의 중요한 정치적 이슈 중 하나는 바로 예송 논쟁이었다. 예송 논쟁은 임금이 죽은 후 상복을 입는 기간에 대한 논의에서 비롯된 갈등이었다. 효종이 승하하면서 서모였던 자의대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격렬하게 대립했다.
서인 측은 주자가례에 따라 1년을 주장하며 승리하였고, 이 사건은 '기해예송'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현종 시기, 효숙왕대비의 죽음과 상복 기간에 관한 논쟁이 또다시 일어났고, 현종은 남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를 '갑인예송'이라고 한다. 이로써 서인과 남인의 정치적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고, 왕권과 붕당 간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표면화되었다.
2. 숙종의 정치적 변혁과 환국의 시작
숙종은 현종의 적장자로 태어나 14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어린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렴청정을 거치지 않고 직접 정치를 시작했다. 숙종은 대동법을 경상도와 황해도까지 확대하고, 강원도와 삼남 지방에서는 양전 사업을 진행했다. 이를 통해 과세 대상 토지의 전수 조사를 실시하며, 국가 재정을 정비하고 상업을 활성화시킬 수 있었다. 상평통보를 전국적으로 유통시켜 상업의 발전을 도왔으며, 군제 개편을 통해 금위영을 신설하고 오군영 체제를 확립하는 등 왕권 강화를 위한 다양한 조치를 취했다.
숙종은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환국'이라는 정치적 방법을 도입했다. 환국은 왕이 정권을 운영할 당파를 교체하는 정치적 국면 전환을 의미한다. 숙종이 즉위했을 당시, 남인이 정치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남인은 갑인예송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장악했으며, 숙종은 어린 왕이었기 때문에 부왕인 현종 시대의 중심 관료들에 의지하며 국정을 이끌었다. 남인의 영수인 영의정 허적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1680년, 숙종은 '삼복의 옥' 사건을 계기로 환국을 단행했다. '삼복의 옥' 사건은 영의정 허적이 궁궐에서 허락 없이 기름을 먹인 천막을 사용한 것에 관한 사건이었다. 허적이 자신의 잔치를 벌였고, 비가 오자 급히 유약을 궁에 가져가 쓰겠다고 했으나, 숙종이 이를 거부하고 즉시 병권을 비롯한 주요 관직을 서인 측으로 넘겼다. 이틀 후, 숙종은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등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세 아들이 허적의 서자인 허견과 함께 역모를 꾸민다는 소식을 접했다. 숙종은 이를 기회로 삼아 허적과 윤휴를 처벌하고, 왕족이던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을 처형하는 등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이후, 숙종은 인경왕후와 결혼하였으나, 인경왕후는 천연두로 별세했다. 숙종은 서인 가문 중 명망 있는 민유중의 딸을 계비로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 인현왕후가 15세의 어린 나이에 궁에 입궁하면서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하게 된다. 서인 가문과의 국혼을 통해 주요 관직은 서인 측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숙종은 3년 후, 건강이 악화되어 와병 중에 있었다. 숙종의 어머니 명성황후는 중전 민 씨와 함께 숙종의 쾌차를 기원하기 위해 절식하고 냉수욕을 하며 치성을 올렸지만, 결국 감기에 걸려 사망했다.
3. 장옥정과 세자 책봉 논란
숙종은 명성황후의 상을 마친 후, 장옥정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장옥정은 대왕대비 전의 궁녀였던 장옥정의 미모로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장옥정은 남인 세력과도 연결되어 있었고,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는 이를 이유로 장옥정을 궁에서 쫓아내었으나,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장옥정을 다시 궁으로 불러들였다. 장옥정은 숙종의 깊은 총애를 받으며 왕자 윤을 낳아 희빈에 책봉되었다. 그녀는 이후 장희빈으로 알려지게 된다.
하지만 숙종과 인현왕후 사이에 후사가 없어지자, 장옥정이 낳은 왕자 윤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논란이 일었다. 서인 측은 장옥정과 남인 세력과의 연계를 이유로 왕자 윤의 세자 책봉을 강력히 반대했다.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은 "중국에도 그런 전례는 없다"며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고, 이에 화가 난 숙종은 서인 측을 강하게 압박하며 숙청을 단행했다. 송시열의 관직을 삭탈하고 지방으로 쫓아낸 후, 서인의 주요 인물들을 처벌하거나 사사시켰다. 이후, 숙종은 남인으로 주요 관직을 교체하며 권력을 강화했다. 이 사건은 '기사환국'으로 알려졌다.
장옥정은 중전이 되었지만, 그녀는 정치적 위기 속에 있음을 알았다. 숙종은 장옥정의 오빠 장희재를 처형하는 등 정치적 조치를 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옥정은 신당을 설치해 왕비가 죽기를 기도한 사건이 발각되었고, 숙종은 이를 참을 수 없어서 장옥정에게 자진하라는 명을 내렸다. 장옥정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후, 세 번의 환국을 통해 숙종은 왕권을 더욱 강력히 쥐게 되었고, 붕당 간의 정권 경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숙종의 정치적 변혁과 환국은 그가 절대적인 권력을 쥐게 된 중요한 전환점을 의미하며, 조선 중기의 붕당 정치와 왕권 강화의 복잡한 역학 관계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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